나는 지하철을 선호한다. 정해진 시간에 갈 수 있고,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마음이 편하다.
칠십이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가 내 옆에 앉는다. 앉으면서 기침을 한다. 1분, 2분, 3분… 계속 기침을 하더니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 물을 찾는다. 그러나 지하철 안에 물이 있을 리 없다. 할머니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기침이 나오는 대로 목소리는 가늘어진다.
이때 맞은편에 세 살쯤 되는 아이가 물병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달려가 솔개처럼 채 온다. 아이는 기절할 듯 엄마 품에 머리를 박고, 노파는 목구멍에 물을 밀어 넣듯 마시고 또 마신다. 그러고는 ´이제 살았다´라며 숨을 크게 내쉰다.
나도 주위 사람들도 어리둥절했다. 어린애는 여전히 엄마 품에 머리를 묻고 있다. 엄마는 노파의 무례한 짓에 당황하면서도 물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. 그리고 노파는 자기변명을 하듯 말한다.
˝네가 내 은인이다. 조금만 늦었어도 내 명은 가고 마는 것인데 네가 날 살렸어˝ 하며 치마 속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어린애 손에 쥐여 준다. 어린애 엄마는 사양했지만, 노파는 돈을 억지로 맡긴다.
˝그 물병에서 환한 빛이 나오면서 내가 그리로 끌려간 거야.
그 물이 날 살렸으니 만 원 아니라 십만 원도 아깝지 않아. 이것을 돈으로 여기지 말고 내 생명의 대가로…˝ 한다. 그리고 말을 잇는다.
˝노인정에서 누가 날밤을 주기에 먹고 지하철을 급히 탔는데, 속껍질이 목에 걸렸어. 그 순간 물을 마시면 살 것 같은데 지하철 안에 무슨 물이? 죽는 줄 알았지. 한데 네가 물병을 가지고 있었어. 그것이 환하게 보였던 거야. 너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.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.˝ 이렇게 말하고 나니, 이번엔 엄마가 어린애의 물에 관해 이야기한다.
그 애가 물장난하느라 정수기 물을 담았다는 그것과 물을 담느라 집에서 출발이 늦었다는 이야기, 그래서 꾸중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한다.
그러고 보니 묘한 인연(因緣)이다.
이게 운(運)이고 이게 명(命)인가. 운명(運命)? 그렇다면 운은 무엇이고, 명은 무엇인가? 그 애가 물장난을 했고, 그 애 때문에 지하철을 늦게 탔고, 그리하여 그 노파와 마주 앉게 됐다. 만일 어떤 악의에 찬 운명의 신이 노파의 생명을 노렸다면, 그 아이 때문에 계획이 깨진 것이 아닌지.
아이는 그 순간 자리에 생명수를 가지고 나타났다. 이게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인가? 어쩌면 그리도 묘하게 그 시간, 그 장소, 그 물이 노파에게 맞아떨어졌을까?!
고마운 일이다. 고마움이란 생명을 담보로 했을 때 더 가까이 보이는 것이겠지.
/이생진-